그녀를 버려요 - 1 쓰다

# 네이버 블로그에 2010년 여름 공개했던 3편짜리 단편.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원망한다. 그 날 햇살처럼 환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웃던 너를 원망한다.
나와의 추억서린 나날들을 모두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고, 몇 번 얼굴도 보지 않은 능력있는 여자를 택한 너의 유연한 현실성을 경멸한다.
나의 사랑은 흉하게 벗겨진 매니큐어처럼 빛 바래고 갈라져 껍질만 남았다.
그러나 손톱 끝에서 부스러지는 분홍빛 매니큐어보다 더 경멸스러운 것은, 너의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 주겠다 약속해 버린 바보같은 나일 것이다.


 

<<그녀를 버려요 - 1>>


 

"뭐 해요?"
"보면 몰라요?"
"거기서 뛰어내리려고요?"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세요."
"유서는 썼어요?"

이 남자 대체 뭔지 모르겠다.
제 정신이 박힌 남자라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구두를 벗고 웅크린 채 앉아서, 빨개진 코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이런 소리는 안 건넬 것이다.

"어디 보자... 이게 유서인가?"
"어, 어?? 누구 맘대로 보는 거예요?!"
"유서잖아요. 어차피 거기서 뛰어내리면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 보라고 쓴 거 아니예요?"
".....듣고 보니, 것도 그렇네요."
"그니까. 봐도 괜찮잖아요."
"씨... 보지 말아요! 본인 앞에서 읽는 것은 여자에 대한 매너가 아니라고요!"

스타킹만 신은 맨발로 벌떡 일어선 나는, 그의 손에서 막 펼쳐지기 직전인 종이 쪼가리를 휙 뺏어들고 구깃구깃하게 뭉쳤다.

"어라? 그거 구기면 어떡해요? 유서잖아요."
"댁이 가고 난 뒤에 다시 잘 펼 거예요!! 상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죠!"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가락을 턱에 댄 채 흐음 소리를 내었다.

"....예쁜 얼굴인데. 마스카라가 좀 번져서 아쉽네요."
"울어서 그래요! 울어서!!!"
"손수건 필요해요? 줄까요?"
"됐어요!"

뭐, 이런 무례한 참견남이 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금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는 검푸른 바다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비오듯 쏟아지던 눈물은 이 무례한 남자의 등장과 함께 쪼그라든 것처럼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제발 빨리 가 버리라고 비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슬리는 인기척과 함께 내 곁에 함께 쪼그리고 앉은 검은 수트차림의 남자가 히죽 웃었다.

"왜 꼭 자살하려 하는 사람들은 신발 밑에 유서를 넣어두는 걸까요?"
"....아직도 안 갔어요? 제발 날 좀 혼자 냅둘 수 없어요?"
"내가 가면 여기서 뛰어내릴거잖아요."
"내가 여기서 번지점프를 하든, 다이빙을 하든 댁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것도 그렇네요."

뭐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 얼굴은 틀림없이 엉망진창일 것이다. 울어서 코끝은 빨갛고, 마스카라는 형편없이 번져 있을 거고, 파운데이션은 엉망으로 뭉쳐 있겠지. 여자로선 최악의 얼굴이라 생각한 내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돌리자, 내 얼굴을 따라 목을 길게 빼고 시선을 움직인 남자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내 구두를 집어들었다.

"우와.... 여자들 구두는 진짜 작네요."
"작긴 뭐가 작아요? 245 사이즈나 되는데. 여자들 구두 치고는 큰 편이라고요."
"그래요? 이렇게 작아 보이는데?"
"여자 구두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죠? 그 디자인의 구두, 국내 브랜드 매장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사이즈라서 해외 주문까지 한 거라고요. 무려 내 남자친구가 생일 선물로 사 준....."

거기까지 말한 나는 목에 걸린 말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근처에 놓아 둔 핸드백을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아낌없이 눈물을 닦고 코를 팽 풀어댔다. 흠칫 놀란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의 뒷면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을 닦을 때마다 마스카라의 검은 얼룩이 흉하게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그게 뭐 대수라냐. 생판 처음 본 남자와의 첫인상은 이미 최악이고, 선 자리 나온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거.... 남자친구가 사 준 거?"
".....전 남친."
"전 남친?"
"그래요. 다음 달에 결혼한대요."
".......아가씨 말고 다른 사람이랑?"

전 남친이라 말했는데 이 남자는 대체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건가. 이비인후과의 귓속 청소 정기서비스 3개월권을 추천하고픈 마음을 꾹 눌러 참은 나는, 더러워진 손수건을 절벽 아래로 휙 던진 다음 퉁명스런 목소리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럼 헤어진 저랑 결혼하겠어요? 당연히 딴 여자랑 결혼하지!!"
"왜요? 이렇게 예쁜데? 그 여자가 아가씨보다 이뻐요?"
"무슨 개떡같은 소리!! 내가 훨씬 더 이쁘고 몸매도 좋은데!!!"

벌떡 일어선 내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분통을 터뜨리자, 쪼그리고 앉은 채 여자 구두를 손에 든 남자가 멀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그 여자보다 이뻐요?"
"당연하죠!! 걔는 눈을 두 번이나 뜯어 고치고 코를 세 번이나 했는데도 얼굴이 그 모양이라고요!!! 감히 자연산인 나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인조인간처럼 생겨가지고 제대로 웃지도 못한다고요! 성형 부작용 때문에 웃지도 못한다니, 이런 웃기는 경우가 어디 있겠어요? 가슴에도 이만한 소금물 주머니를 집어넣었는데 허리가 절구통이라 섹시하지도 않고!! 집에 돈도......!! .....젠장... 돈은 나보다 많구나."

울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눌러 참은 나는 구겨진 스커트를 탁탁 털며 남자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아니, 사실 그의 곁에 앉았다기보다는, 바위 위의 협소한 공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근처에 앉은 거지만.

"아무튼 그 구두도... 내가 원한것도 아닌데 자기가 무리하게 카드빚 내서 사줘 놓고선.... 나중에 내가 졸라서 무리하게 사줬다느니 어쨌느니, 돈도 없는게 명품만 밝히는 된장녀라느니 어쨌느니... 자기 블로그에 그렇게 써 놓았더라고요. 개같은 자식... 누가 이딴 거나 갖고 싶댔나? 생일날에 시간 내서 곁에 있어 달라고만 했었지, 누가 이딴 구두 갖고 싶댔나? 내 생일날 딴 여자랑 바람피우느라 코빼기도 안 보인 주제에. 지가 양심에 찔려서 무리해서 사줘놓고 왜 내 탓을 해?"
"....개같은 놈이네요."
"개같은 놈이예요!! 내가 자기 품격과 집안에 맞지 않는다 이딴 소리나 해 대면서 나를 찼다고요. 이렇게 노래도 잘 부르는 데다가 섹시하고 멋진 여자를 찼단 말이죠. 지 주제를 알아야지!!"

울분을 터뜨린 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구두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 구두를 가볍게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꺄악!!!! 뭐 하는 거예요?!?!"
"어차피 여기서 뛰어내리면 신지도 못할 구두잖아요."
"저게 얼마짜린줄 알아요? 루부탱, 무려 루부탱이라고요!!!"
"루부탱이고 밤탱이고 뭐고 간에... 얘기 듣고 보니 아가씨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개같은 전 남친이 사 준 거구만요, 뭐... 이미 지나간 미련 따윈 훌훌 버리는 게 좋아요."
"......씨이. 아무리 그래도 여자 구두를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진짜지 매너가 꽝이네요."
"그럼 내가 새 구두 사줄테니 가요."

그 말에 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지고 새카만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 속에서 유난히 하얀 이가 싱긋 웃고 있었다.

".....나 여기서 뛰어내릴 건데?"
"지금 뛰어내리면 물고기밥밖에 더 돼요? 퉁퉁 불은 얼굴로 수면에 떠올라서 해양순찰대 형님들에게 민폐나 끼칠 생각이라면, 그만 집어치우고 갑시다."
"댁이 내 구두 버렸잖아요! 이 차림으로 어떻게 걸으라고요!"
"거 참... 여러 모로 손 많이 가는 아가씨일세. 그럼 내가 업어줄게요. 됐죠?"
".....나 비싼 구두 고를 건데?"
".....밤탱이는 곤란한데."
"루.부.탱!!!! 크리스찬 루부탱!!! 그리고 루부탱 따위 쓸데없이 비싸서 맘에 들지도 않아요. 난 금강제화가 튼튼하고 오래 가고 좋더라 뭐."
"오케이. 금강제화. 잘 됐네, 나 할인권도 있는데. 혹시 할인권 쓰는 남자 싫어해요?"
"싫어할 게 뭐 있어요? 알뜰하니 좋죠, 뭐."

내 말에 싱긋 웃은 남자가 나의 핸드백을 주워들고 등을 내밀었다.

"그럼 업혀요."
"아, 잠깐만요."

나는 손 안쪽에 구깃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들어 씩씩하게 쫙쫙 찢었다. 그리고는 검푸른 바다를 향해 아낌없이 흩뿌린 뒤, 뭐가 좋은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남자의 등에 척하니 업혀들었다. 방금 처음 만난 남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그의 등 위에서, 나는 코를 훌쩍이며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묻었다.

"....당신 설마 인신매매범 뭐 이딴 거는 아니겠죠?"
"인신매매범이면 어쩔건데요?"
"비명 지른 다음 거시기 걷어차고 도망갈테야."
"오우. 무섭네."

그러나 말의 내용과는 달리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를 낸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남자에게 차이고 절벽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한 여자에게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아니예요. 김호진이예요."
"이름 되게 이상하다."
"뭐가 이상해요! 이쁘기만 하구만. 댁 이름은 뭔데요?"
"오주헌."
"에이... 자기도 뭐, 만만치 않구만."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내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자, 조용한 침묵이 주위를 둘러쌌다.

".....울지 마요."
"...누, 누가 울었다고 그래요?! .......훌쩍....."
"원한다면 내가 새 남친 해 줄수도 있는데."
"됐네요! 아저씨!"

그의 등을 팍 내리친 내가 코를 훌쩍이자,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킥킥 웃는 게 느껴졌다.

스타킹은 줄이 나가 있고, 울어서 얼굴은 엉망이고, 스커트는 구겨졌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아꼈던 구두는 지금쯤 동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있겠지만... 기분은 무엇보다도 날아갈 듯 상쾌했다.

나쁘지 않다.
그래.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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